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M14 소총 (문단 편집) ==== [[M1 카빈#M2|M2 카빈]]에 대한 잘못된 불신 ==== 1950년대가 되면서 미군은 기존에 있던 테스트 화기들을 통합하고, 신형 화기의 폭을 좁히게 된다. 당시 가장 유력한 후보는 T20, T22 계열과 아직까지 명맥이 이어지던 T25였다. 미군은 T20과 T22는 좀 더 고전적인 M1 개런드와 비슷한 쪽으로 개량했으며, 최후에는 하나로 합쳐지게 했다. T25는 T37로 고전적인 개머리판 디자인으로 개량한 물건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에서 [[6.25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도 이 신형 제식소총은 완성되지 않았기에, 미군은 [[6.25 전쟁]] 중 기존의 [[M1 개런드]]와 1944년에 새로 도입했던 자동소총인 [[M1 카빈#M2|M2 카빈]]을 그대로 들고 가야 했다. 이렇게 미군은 2차 대전 당시 총기를 그대로 들고 북한군 및 중공군과 맞섰다. 특히 상술한 M2 카빈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는데, 새뮤얼 마샬 준장이 이끄는 조사팀이 일선 병사들의 의견을 취합해 본 결과 "M2 카빈은 저지력이 너무 낮다, 특히 겨울옷을 두껍게 입고 몰려오는 중공군들은 .30 카빈탄으로 쓰러뜨릴 수가 없다"는 불만이 지배적이었다. 중공군들은 카빈탄의 사격을 버티며 접근해 수류탄을 던지기 때문에 미군의 피해가 크다는 것이었다. M2 카빈으로 중공군을 쓰러뜨릴 수 있는 거리는 대개 50야드(45미터) 이내였으며, 이 거리라면 대부분의 병사가 수류탄을 투척할 수 있는 거리이다.[* 때문에 M2 카빈이 가장 유효한 상황은 야간 정찰이었으며, 야간 정찰용인 M3 카빈이라는 변종이 만들어지기도 했다.(적외선 램프와 야간투시경이 달려 있다.)] 물론 M2 카빈이 사용하는 .30 카빈(7.62×33mm) 탄약은 M1918 BAR이나 M1 개런드가 사용하는 .30-06 스프링필드(7.62×63mm) 탄보다는 저지력이 약하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M2 카빈의 "약한 저지력"은 사용하는 탄의 위력 문제가 아니었다. .30 카빈으로도 유효사거리 내에서 방한복을 입은 병사를 저지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였으며, 저지력이 낮은 것처럼 보인 이유는 명중하는 탄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카빈이 워낙 가벼운데다(2kg이 좀 넘는다) 개머리판 각도가 총구 축선과 일치하지 않다는 문제 때문에 반동이 커서 총의 제어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M2 카빈의 연사속도가 빨라서(750RPM) 그렇다는 얘기도 있지만 .30 카빈 탄과 750RPM의 연사속도 조합으로는 반동이 크게 나오기 힘들다. 반동이 커진 건 전술한 무게와 개머리판 각도 문제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지역예비군 훈련에 쓰이던 M1 카빈의 경우도 단발사격을 할 때 소총의 너무 가벼운 무게와 개머리판 각도 때문에 튀는 문제가 있다. 사실 750 RPM이면 전투소총 중에선 좀 빠른편에 속하지만 돌격소총 중에선 평균 수준의 연사력이다.] 그런데 사격장에서 과녁을 맞히는 것도 아니고 실전 상황에서 인해전술로 몰려오는 중공군에게 연사하는 중에는, 이게 탄이 빗나가는 건지 아니면 탄을 맞고도 달려드는 건지 구별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군인에게 "왜 중공군을 못막아?"하고 물어보면, "저희가 적들을 맞히질 못해서 그렇습니다" 할 군인이 있겠는가? 열이면 열 "총알이 약해서 그렇습니다" 할 것이다.[* 때문에 훗날 [[M16 소총]]을 도입한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 때부터는 이런 식의 설문위주 조사에서 탈피하여 실제 수치에 근거하는 "통계 중심"의 국방정책을 사용하게 된다.] 더욱이 이 M2 카빈의 저지력 오해의 주 소지가 된 [[장진호 전투]]의 경우 해당 전투지역이던 장진호 일대가 당시 영하 45도를 밥 먹듯 기록하는 최악의 혹한지[* 오죽하면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뛰어넘는 인류의 전쟁사상 가장 춥게 기록된 전투라는 말이 있을 지경이니.]였다. 때문에 병사들도 최악의 컨디션 속에서 싸워야 했으며 일반적인 상황에서보다 명중탄이 줄어들었고, 추운 기온으로 인해 화약 연소가 잘 되지 않아 가스압이 떨어져 위력과 신뢰성이 매우 떨어졌다. 거기다 적군이였던 중공군들도 단순히 징집된 병사가 아닌 수년간의 전투경험이 있는 군대였음으로 단순 제압사격으론 그들을 멈추게 하는 것 또한 힘들었다.[* 하지만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 프랑스군은 M1카빈도 충분한 저지력이 있다는 판단 하에 주무장으로 선택했고 히스토리채널에서 사람 몸통 두께의 벌리스틱 클래이 블럭에 시험해 본 결과 1발 사격으로도 클레이 블럭이 터지면서 큰 공동을 만들어 프랑스군의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하였다. 실제로 .30 카빈 탄환은 권총 탄환 중 가장 강한 축인 .44 매그넘 탄환과 동등, 혹은 그 이상 수준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책임자였던 새뮤얼 마셜 준장은 현장에서 전투를 겪은 야전 지휘관이 아닌 군사사 연구가로 당시 이런 실상을 몰랐고, 미군 수뇌부에게 병사들의 변명대로 "M1 카빈 계열은 탄이 너무 약합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런데 이는 미군(특히 육군) 수뇌들의 구미에 맞는 보고였다. 당시 미 육군 수뇌부에는 M1 개런드 빠들이 잔뜩 있었다. [[조지 S. 패튼]] 장군은 개런드를 "가장 훌륭한 전쟁 도구"라고 칭찬했을 정도다. 이 마초들은 실제 병사들의 고충을 모르는 안전한 후방에서 지휘하는 입장만 생각하고 "그것 봐, 카빈탄으론 안 된다니깐? 미군이 쓰는 제식총은 역시 개런드처럼 화력이 세야 한다!"며, 개런드의 화력의 연장선에 있는 소총과 신형 탄약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살제로 지난 10여년간 벌어진 전투들을 분석해, 소구경 고속탄의 자동사격에서 나오는 높은 효율에 대한 보고인 '히치맨 보고서'가 1952년 미국에서도 보고되었음에도 말이다. 이 결정은 특히 T65 탄약의 선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결국 최종적으로 T65 탄약이 제식화된 후 M2 탄두의 크기 때문에 넥이 약간 길어져 51mm 로 늘어난 T65E3 탄약이 개발되었고, 곧 NATO 표준 탄약([[7.62×51mm NATO]])으로 선정되며 신형 소구경 탄약을 준비하고 있던 다른 NATO 회원국들(특히 .280 브리티쉬 탄약을 준비하던 [[영국]])에게 빅엿을 날리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